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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TORY소개

C-Story 운동을 통한 칼빈주의 실천

2010년 11월, 나는 어느 조그마한 신학교에서 칼빈주의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강의가 거의 마쳐 갈 즈음에서 나는 탄식과 후회스런 내 속마음 하나를 털어놓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근 45년 동안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왔다. 그래서 일생동안 나는 학교에서 「칼빈주의」와「구속사적 강해설교」를 가르쳐 왔다. 뿐만 아니라 1985년에는 [한국칼빈주의 연구원]과 [칼빈 박물관]을 세워서, 칼빈신학 전파와 칼빈주의 사상을 확장 하는데 심혈을 기우렸다”고 했다.

우리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과 칼빈 박물관에는 국내외에 수많은 학자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나는 <한국 칼빈학회>의 창립 멤버가 되어 20여 년 동안 임원으로 지냈다. 4년 동안 회장을 역임 했으며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칼빈 연구니 칼빈주의 연구가 너무 학문적인 것에만 치우쳤다. 칼빈 주의가 구체적인 우리의 삶속에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 했다.

사실, 약 20년 전에 나는 일본 칼빈협회에 초청으로 특강했다. 그런데 당시에 일본 칼빈주의 연구생들은 신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목회자들, 문학가들, 물리학자, 철학자, 의사, 법률 정치 가, 예술가,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200여명이 참석했다.

일본의 고배(神戶)가까이 있는 [셍가리수양관]에서 강의 할 때, 그 모습을 보았던 나는 왜 한국 에서는 칼빈 또 칼빈주의 운동이 몇몇 신학자들의 현학적 연구에만 그쳤는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해서 살아가는 운동이 없는 것인가를 생각했다. 신앙 인구의 비례로 따진다면 일본이 200명의 칼빈주의 운동가들이 있다면, 우리는 2만 명 또는 20만 명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나는 그 좋은 날을 다 보내고, 이제 은퇴 했으니 때가 늦었다고 한탄했다.

그때, 어느 목사님이 손을 번쩍 들더니만 대뜸 하는 말이 “교수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그분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래서124 제1부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제1부 한국칼빈주의연구원 125한국칼빈주의연구원 30년사 몇몇 신앙의 동지들과 의논 하면서 4개월의 연구 끝에 2011년 4월30일에 C-STORY운동을 창설하게 되었다.

즉 칼빈주의 사상이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의 주장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 그리고 그의 영역주권을 인정한다면, 교역자이던, 정치가이던, 법조인이던지, 예술가이던, 과학자이든 교육자이던, 실업가이던 간에, 그가 있는 삶터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해서 소명감을 가지고 일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일에 같은 생각과 같은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또 구체적으로 칼빈주의 사상을 펼치기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